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본래 이 [[갈리시아]] 지방은 [[고대 로마]] 시대의 이리아 플라비아(Iria Flavia)[* 현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시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[[https://es.wikipedia.org/wiki/Padrón_(La_Coruña)|파드론(Padrón)]]이라는 도시이다.]라는 [[히스파니아]] 식민 도시가 자리잡은 곳이었다. [[그리스도교]]의 전승에 의하면, 사도 [[대 야고보]]는 서기 44년 [[예루살렘]]에서 체포되어 [[12사도]] 가운데서 제일 먼저 [[순교]]하기 전, 스승 [[예수]]의 [[산상수훈|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유지]]를 받들어 당시 [[로마 제국]][* 고대 지중해 일대의 세계관은 로마 제국이 곧 세계라는 인식이 있었다.]의 최서단인 히스파니아의 이리아 플라비아까지 가서 선교하고 돌아왔다.[* 가톨릭 백과사전에 따르면 이 전승 자체가 9세기는 되어야 믿을 만한 기록에서 등장하기 시작하며, 초기 교회 전승이나 로마서의 스페인에 대한 언급, 이베리아까지의 거리로 볼 때 역사적 근거는 희박하거나 없는 수준이라고 학계에서 평가된다.] 사도가 [[예루살렘]]에서 순교한 뒤, 그를 따르던 초대 교회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그의 유해를 보존하려고 했다. 13세기 작품인 야코부스의 [[황금전설]]의 묘사에 따르면, [[대 야고보]]의 두 제자가 해안에 기적적으로 마련된 배에 사도의 유해를 싣고 그가 마지막으로 선교한 이리아 플라비아 지방에 도착해 그 곳에 안장하게 되었다. 이후 세월이 흘러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[[밀라노 칙령|종교의 자유]]를 얻고, 이 이리아 플라비아 지방에도 그리스도교 [[교구]]가 설정되었다. 남아있는 기록에 의하면 6세기부터,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이미 최소한 4세기부터 이리아 플라비아 교구는 ‘성 야고보의 땅(Locus Sancti Iacobi)’으로 불리고 있었다. 이 사실 때문에 지금도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보존된 사도의 유해가 진짜 유해임을 확신하고 있으며, 이미 19세기 [[레오 13세]] 교황에 의해 이를 확언하는 교서가 반포된 바 있다. 그러나 이리아 플라비아 지역 교회가 누렸던 이 영예는 로마 제국, [[서고트 왕국]]의 연이은 멸망에 이어 찾아온 [[알안달루스|이슬람 세력의 이베리아 지배]]로 잊혀지게 된다. 시간이 흘러 9세기 에스파냐에 다시 [[아스투리아스 왕국|가톨릭 국가]]가 일어나 [[갈리시아]]를 수복한 뒤, 고대의 야고보 사도에 대한 신심이 되살아나게 되었다. 서기 814년 은수자 성 펠라지오가 한밤중에 별빛이 들판 위에서 [[도깨비불|기묘하게 춤추는 현상]]을 보고서는, 그곳으로 가보니 이슬람 지배 하에서 잊혀졌던 [[대 야고보]]의 무덤이 있었던 곳이다. 콤포스텔라라는 이름은 이 이야기에서 유래한 Campus stellae(별들의 들판)에서 나온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.[* 정설은 아니며 공동묘지라는 뜻의 [[라틴어]] compositum이 [[로망스어]]로 변화하면서 생긴 단어로 보는 시각이 많다. 야고보 사도의 제자들이 박해를 피해 사도의 유해를 공동묘지 한가운데에 숨겼을 것과 위의 [[도깨비불]] 현상을 고려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.] 이 소식을 들은 아스투리아스의 알폰소 2세는 유해를 봉안하기 위한 성당 건축에 착수해 829년 첫 성당 건물이 세워졌다. 이것이 이리아 플라비아(파드론) 땅에 세워진 첫 기념 성당이다. 그러나 얼마 안있어 [[노르드]] 해적들의 약탈로 도시가 파괴되면서 파드론 북쪽에 위치한 콤포스텔라 성채로 유해와 성당을 옮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. 따라서 레온의 알폰소 3세의 명령에 따라 879년 [[로마네스크]] 양식의 성당이 세워지니 이것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전신이다. [[레콘키스타]] 과정에서 이슬람 세력의 공격에 휘말린 적도 있었다. 서기 997년 [[후우마이야 왕조]]의 재상 [[알 하지브 알 만수르]]는 갈리시아를 침공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함락시켰다. 그리고 성당을 파괴하고 대문과 종을 뜯어가 [[코르도바(스페인)|코르도바]]의 [[메스키타|대모스크]]를 장식하는데 썼다. 그러나 기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어느 정도는 배려해 성 야고보와 유해와 성유물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.[* 사실 [[이슬람교]]의 입장에서도 남의 묻힌 무덤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은 크나큰 죄이다. 무슬림들이 [[화장(장례)|화장]]을 엄금하고 [[매장]]만을 고집하는 것을 생각해보자.][* 그리고 1236년 카스티야가 코르도바에 입성한 후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3세는 원래 대성당의 대문과 종이었던 [[역관광|대모스크의 대문과 종을 다시 뜯어가 톨레도 대성당을 장식하는 데 썼다.]]] 1075년 성당을 재건하면서 이전보다 더욱 크게 지어 1211년 마침내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이 완성되었다. 이 대성당은 이후 시대가 지나면서 유행한 다양한 양식이 반영된 장식이 덧붙여졌는데, 지금의 바로크 양식의 외관과 인테리어는 18세기에 확립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